十一.
구원의 손길은 관우가 떠난 지 며칠 지나지 않아 찾아왔다. 그건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조금만 더 늦었어도 우울함에 질식했을 테니까. 격무에 시달리는지 대단히 신경질적인 태도의 변호사는 장료에게 매우 압축적으로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그가 전해준 말은 이랬다. 여포의 내란을 재검토해 봤는데 한 증인이 했던 증언들이 전부 위증으로 판명 났다, 근데 그게 장료 당신과 관련이 있었고 그것 때문에 몇 가지 혐의에서 빠지게 됐다. 그러면 재판을 다시 해야 하는데, 저지르지도 않은 죄로 복역했고 또 정부가 슬슬 민심을 얻기 위해 사람들을 풀어주려는 분위기니 아마 형량을 깎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이번 중추절 특별 사면 대상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뒤는, 그자의 말 그대로였다. 어이가 없었다. 물론 장료는 멍청이가 아니니 입을 다물고 있었지만, 그들이 자신이 저지르지 않았다고 벗겨준 죄는 전부 그의 것이 맞았다. 아니, 사실 그것보다 더 많았다. 이래도 되는 걸까? 이게 이렇게 별것 아닌 일이었나? 나 정도의 인생 하나는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건가? 풀려났다는 감동보다도 죄책감과 허망함, 분노가 더 컸다.
그는 자유의 몸이 되었다.
하지만 그 소식에 함께 기뻐해 줄 사람은 아무도 남지 못했다.
장료는 웃었지만, 곧 울고 싶어졌다.
十二.
그는 관우와의 약속을 지켰다. 정말로 범죄에서 손을 떼고, 대신 택시 운전사가 되었다. 대단한 인생 역전 스토리지만, 순전한 그의 노력만으로 이루어낸 것인가? 하고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건 아니었다. 일단, 나라에서 그에게 약 1년간 죄 없이 -말도 안 돼!- 복역한 데에 대한 보상으로 꽤 많은 돈을 주었다. 장료는 그 돈으로 먼저 목과 팔뚝의 문신을 지웠다. 남은 돈은 세 들어 살 집과 직업을 구하는 데 썼다. 계속된 내전으로 젊은 남자가 많이 죽었기 때문에 그 과정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강북 지역이 조조의 엄격한 독재하에 상당히 안정을 되찾게 된 것도 한몫했다. 요즈음의 청소년들은 장료와는 다른 환경에서 자랄 것이다. 잘된 일이지.
가끔, 장료는, 삶이란 이미 정해진 운명이란 큰 물줄기를 따라 그저 밀려갈 뿐인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의 선택이 어떤 의미가 있었단 말인가? 무엇을 바꿨단 말인가? 그가 선택이라고 여겼던 고민의 결과물들은, 사실 모두 유일한 길을 따른 것뿐이었는데 말이다. 그런데도, 장료는 종종 과거를 회상하며 후회에 잠겼다. 어리석은 짓이다. 삶이 자신의 통제 바깥에 있다면, 설령 돌아간다 한들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까 말이다. 안다,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머리는 이미 그들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들과 보냈던 시간과, 그때 느꼈던 감정은 머리가 아니라 가슴에 새겨져 있단 말이다. 심장을 후벼파내지 않는 이상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그것들은 적당한 자극이 주어지기만 하면 가슴 바깥으로 튀어나오려 버둥거렸다. 장료는 그 고통을 겪고 싶지 않아 그것들은 가장 깊은 곳에 파묻어 두었지만, 인생은 그렇게 마음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최고의 충격은 예상치 못한 순간에 별것도 아닌 모습을 하고 찾아온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평소처럼 일어나 아침을 먹으며 핸드폰으로 웹서핑을 할 때였다. 오늘부터 눈이고 모레는 폭설이라네, 휴가를 낼까. 장료는 날씨와 가십거리에 대한 소식만 읽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원래부터 잘 알지 못했지만, 이십여 년 전 일련의 사건을 겪은 뒤로는 완전히 관심을 꺼버렸다. 어차피 몇 줄짜리 기사 쪼가리를 읽는다 해서 그의 인생에서 달라지는 것도 없으니까. 마음에 드는 자극을 찾으려 무성의하게 스크롤을 내리던 중, 눈에 띄는 단어가 하나 있었다. 실시간 검색어 탭에 그가 아는 이름이 올라 있었다. 직감적으로, 동명이인이 아니라 그가 아는 바로 그 사람에 대한 소식이며, 좋은 내용일 리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장료는 끝내 그 이름을 눌렀다.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의 힘에 이끌려서.
[속보] 형주 반군 수괴 관우, 손오에 처형
장료는 핸드폰을 내려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창문으로 바깥에 눈이 날리는 것이 보였다. 눈… 여포가 잡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이렇게 눈이 왔었다. 나중에 찾아본 처형장에서도… 아니, 안 돼. 장료는 사고에서 빠져나와야 한다는 것을 자각하고 몸을 돌려 다시 식탁으로 가 물 없이 알약을 씹어 삼켰다. 약효가 바로 돌 리는 없겠지만 그 행동을 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조금 진정됐다. 그는 한참을 앉아 심호흡하다가 괜찮아졌다 싶어지자 전화를 걸어 출근할 수 없음을 알렸다. 전화가 끊어지자 집은 다시 적막에 빠졌다. 그것을 견딜 수 없어, 장료는 리모컨을 집어 들고 아무 채널이나 틀었다. 그러나 바로 후회하게 되었다, 기존 방송을 끊고 보도될 정도라니. 형 정말 대단한 사람이었네요.
장료는 이게 자신의 의지로 어찌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침실로 향했다. 침대 옆 서랍에는 그가 외면해 왔던 것이 들어있었다. 장료는 침대에 걸터앉아 손에 들린 빛바랜 봉투를 바라보았다. 이십여 년 전 관우로부터 이것을 받았을 때, 그가 이것을 열어보지 않은 것은 반항심 때문이었다. 그가 내팽개치듯 남기고 간 것에 매달리고 싶지 않았다. 감옥에서 나가고, 삶이 안정적인 궤도에 들어서기 전까지는 이것이 일종의 목표였기 때문에 열어보지 못했다. 성공한 뒤에 보란 듯이 관우가 남겼던 말을 맞받아치고 싶었다. 그러나 장료는 관우에게 나는 약속을 지켰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게 되었음에도 결국 봉투를 뜯지 못했다. 그것은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 안에 무엇이 있을지 모른다는, 내가 바라는 것과는 다른 게 있을지도 모른다는, 내가 이미 이것을 봐야 할 시기를 놓쳤으면 어쩌지 하는 두려움.
이번에도 내용물을 확인하긴 틀렸다. 장료는 그가 죽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처형 장면을 직접 확인한 (물론 비디오 클립으로 본 거였지만) 죽음마저 이십 년이 지난 지금에도 여전히 꾸며낸 거짓처럼 느껴지는데, 이렇게 갑작스럽게 닥친 소식이 사실로 느껴질 리 없었다. 장료는 그가 옛 형제들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는 그가 그들의 죽음을 전혀 추모할 수 없어서라고 생각했다. 애도할 시간 없이 세상에 의해 갑자기 단절되었으니 삶과 죽음 둘을 이어붙일 수 없는 게 당연했다. 이번엔 다르고 싶었다. 장료는 봉투를 서랍 위에 올려두고 대신 핸드폰으로 기차 시간표를 검색했다. 여행금지령이 내려졌을 까봐 걱정했지만, 아직 서쪽에서 성도로 가는 민간인 개개인의 이동까지는 막지 않는 듯했다. 장료는 밤 기차를 예매했다. 타려면 몇 시간 뒤에 나가야 한다.
장료는 침대에 누워 억지로 잠을 청했다. 약 기운이 돌기 시작하면 부작용 때문에 잠에 들게 될 것이다. 꿈속에서 장료는 새하얀 들판에 서 있었다. 이 끔찍한 곳에서 벗어나기 위해 걸을수록 눈이 점점 높이 차올라 결국에는 턱 끝까지 올라와 목을 옥죄었다. 이상하게도 벗어나려고 발버둥 칠 때 손에 잡힌 것은 눈이 아니라 알약으로 보였다. 장료는 눈인지 알약인지 모를 흰색 알갱이들 속에서 허우적거렸다. 그는 여러 이름을 불렀지만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十三.
예상과 다르게, 성도행 기차에는 사람이 가득가득 차 있었다. 누가 곧 전쟁이 터질 곳에 가고 싶어 하겠는가, 애초에 이쪽 출신인 사람들이 본격적으로 이동 제한 명령이 내려지기 전 돌아가려는 게 대부분인 것 같았다. 그들은 어딘가 불안해 보였고, 무장한 군인이 열차마다 탑승해 있었다. 성도역 내부의 분위기 역시 매우 살벌했다. 이 숨 막히는 공간 안에서 걱정 없이 웃고 있는 것은 벽에 그려진 판다 마스코트밖에 없었다. 그마저도 지역 마스코트 특유의 기괴함 때문에 어딘가가 불쾌하게 느껴졌지만.
방탄조끼를 입고 총을 든 군인들이 짝을 지어 매서운 눈으로 이곳저곳을 살피고 있었다. 명목상으로는 여전히 한의 13주가 같은 나라로 묶였지만, 황건의 무리가 떨치고 일어난 이후부턴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게 되었고, 또 최근 유비가 자치를 선언한 이상 -동네 양아치가 이런 거물이 되다니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이젠 정말 다른 나라나 다름없었다. 장료는 본적이 저 멀리 병주였고, 또 전과 기록이 상당했기 때문에 상세한 검문의 대상이었다. 장료는 철저한 소지품〮몸수색을 끝마치고 심사대로 향했다. 간단한 신변을 묻던 심사관이 말했다.
“익주에 친척, 혹은 지인이 있습니까?”
“아니요.”
“그렇다면 무슨 일로 방문했습니까? 어디서 며칠간 머물 계획입니까?”
“성도 관광을 하려고 왔습니다. 아직 숙소는 못 정했는데, 아마 시내랑 가까운 곳에서 머물지 않을까 싶네요. 일주일 정도 있을 예정입니다.” 실제로는 ‘당신네 관우랑 내가 오래전 아는 사이었는데, 떠나는 길이라도 보려고 왔습니다.’ 라고 말해야겠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믿어줄 리도 없었고.
“이런 때에요?” 심사관이 플라스틱 칸막이에 얼굴을 바짝 가져다 대고 물었다. 장료는 동요하지 않고 다만 어깨를 으쓱였다.
“즉흥적인 여행을 좋아해서요. 내전이 하루 이틀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아직까지 판다 구경을 못 해보기도 했고요.” 즉흥적인 여행을 즐긴다는 말은 사실이었고, 마지막에 농담처럼 덧붙인 것도 진실이었다. 심사관은 잠시 미심쩍은 눈으로 그를 살피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미적미적 여권에 도장을 찍었다.
“불법적인 활동이 포착될 경우 본적이 다르더라도 계엄령에 따라 즉시 체포될 수 있습니다. 익주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즐거운 관광 되시길.”
“감사합니다. 수고하세요.” 장료는 무성의한 환영 인사에 마주 의무적으로 답하고서 발걸음을 옮겼다.
성도는, 도시 전체가 침울함과 긴장에 빠져 있었다. 장료의 외지인 억양이 드러날 때마다 사람들의 눈빛이 조금씩 바뀌었다. 그럴 만도 하지. 이상한 건, 도시 어느 곳에서도 그를 추모하는 모습을 찾을 수 없다는 거였다. 그 정도 지위의 사람이면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기려줄 만도 한데. 왜지? 게다가 그는 유비와 가까운 사이였으니, 정부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국장을 치러줘야 하는 게 아닌가. 정말이지 아무것도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익주에서 자체적으로 타 주州의 유심을 쓰는 핸드폰의 인터넷 접속을 차단했는지, 검색으로 알아볼 수도 없었다. VPN 앱도 먹통이었다. 그럼 어쩔 수 없지, 구닥다리 아날로그식으로 알아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장례식은 언젠가요?” 장료는 호텔 지배인과 적당히 잡담을 나누다 이야기가 요즘 정세로 흘러가자 기회를 놓치지 않고 쏜살같이 물었다. 누구의 장례식인지 문장 안에 그 주체는 없었지만, 지배인은 그가 무엇을 얘기하는지 알아들었다.
“장례식? …여기 사람 아니죠? 말하는 것도 그렇고.”
“네. 병주 출신이에요.” 장료는 잠시 뜸을 들이다 덧붙였다.
“무슨 사정이 따로 있나요?” 지배인은 그를 의심스럽게 쳐다보더니 한숨을 푹 내쉬었다.
“말도 마요. 시체를 돌려받기 전까진 죽었다는 티도 내지 말랍니다." 지배인은 손오에게서 그의 시신을 받아내기 전까진 절대로 그를 추모하지 말라는 지시가 있었다는 정보를 알려주었다.
착잡한 마음을 뒤로하고 침대에 누우려 했을 때, 갑자기 복도에서부터 쿵쿵거리는 소음이 들리기 시작하더니 문이 벌컥 열렸다. 붉은 머리카락만큼이나 시뻘건 눈을 한 거대한 남자가 술 냄새를 잔뜩 풍기며 들어오더니 장료를 향해 삿대질을 했다. 지배인을 포함한 몇 명의 사람들이 뒤에 따라붙어 그를 말리려고 했지만, 거대한 멧돼지 같이 돌진해 오는 거한을 고작 그런 연약한 몸 몇 개로 막을 수 있을 리 없었다.
"이 프락치 새끼, 우리가 그렇게 만만한 호구로 보이냐?" 그가 취기 때문에 새는 발음으로 고래고래 호통을 쳤다.
"무슨 개소리야!" 등신인가? 누가 지금 같은 시대에 이렇게 간첩 짓을 해? 장료는 황당함에 마주 소리를 지르고서 그 우악스러운 손아귀에 잡히지 않기 위해 황급히 몸을 놀렸다.
"익덕, 멈춰!" 그 촌극은 새로 나타난 사람에 의해 겨우 끝이 났다. 오묘한 색의 머리카락을 가진 중년의 그 남자는 장료보다 작은 키에 안색이 퀭했지만, 어딘가 위압감을 주는 면이 있었다. 그제야 장료는 이들이 누군지 알아챘다.
"나는 첩자 질 하려고 여기 온 게 아닙니다. 당신들 운장의 의형제죠? 그 형이랑 아는 사이였어요, 이십 년쯤 전에. 마지막 가는 길이라도 보려고 온 겁니다."
"증거 있어?" 여전히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한 장비가 쏘아붙였다. 장료가 품 안에 손을 넣자 뒤따라온 남자들이 그에게 총구를 겨눴다. 장료는 공격할 의사가 없다는 뜻을 전하기 위해 천천히 봉투를 꺼내고서 두 팔을 양 귀 옆에 올렸다.
"마지막으로 받았던 편집니다. 여기 안에 형의 사진이랑 내게 써준 편지가 들어 있을 겁니다."
"그럼 당장 열어봐!"
성질 한번 급하군. 장료는 떨리는 손으로 이십 년 동안 봉해져 있었던 봉투를 뜯었다. 안에는 두 개의 종이가 들어 있었다. 하나는 편지, 하나는 관우의 사진이어야 했다. 그런데 그의 사진은 아무 데도 없고, 그 대신 뭔지 모를 다른 종이가 들어 있었다. 장료가 당황하자 장비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욕을 내뱉었다.
“이 개새끼가-”
“그만!” 유비가 날카롭게 소리치자 방 안이 다시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같이 봅시다." 그가 장료 옆으로 다가왔고, 장료는 불안한 침묵 속에서 관우의 편지를 펼쳤다. 두 쌍의 눈이 다급하게 글자를 읽어내려갔다.
이게 너에게 쓰는 마지막 편지겠구나.
사실 나는 네가 내가 누구인지 알고 있을 줄 알았다.
네 얘기를 듣고 네가 그저 날 못 알아보는 거라는 걸 알았지.
바로 솔직하게 말하지 못해서 미안하다.
동봉된 기사를 보면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게 될 거야.
헤어질 때라도 진실을 얘기해야지.
네 부탁은 못 들어주겠다. 하지만 이게 맞아.
잘 살아라, 안 좋은 기억은 잊고.
아쉬워하지 마. 그때가 되면 나라는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마저 잊게 될 거야.
다리에 힘이 풀렸다. 장료는 비틀거리며 침대에 주저앉았다. 읽어야 할 건 아직 하나 더 남아 있었지만 확인하고픈 마음이 들지 않았다. 유비는 그의 손에서 조심스럽게 편지를 빼가더니 자기 동생에게 그것을 전해주었다.
"운장이 쓴 게 맞아." 축 처진 목소리였다. 그가 몸을 돌리더니 장료에게 고개를 숙였다.
“오해해서 정말 미안합니다. 동생을 대신해서 사과드립니다."
유비는 장료에게 사과한 뒤 여전히 주저앉은 채인 장비에게 다가가 낮은 목소리로 무언가를 말했다. 한 마디가 끝날 때마다 울음을 가까스로 삼키는 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굵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우는구나. 그래. 평생을 함께했던 형제가 죽었으니 당연히 슬플 것이다. 심지어 시신마저 묻어줄 수 없다면 얼마나 비참할까. 이렇게 애도해 줄 사람이 있다니 인생 잘 살았네요. 그렇지만 형은 나도 형을 기억할 거라고는 생각도 안 했겠죠. 벗어나고 싶은 곳에서 1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만났던 애 따위. 내가 형한테 조금이라도 의미 있는 사람이긴 했어요?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그럴 거면 애초에 잘해주지도 말지. 어째서...... 생각의 굴레를 깨 준 것은 유비였다.
"이제 기억나네요. 우리, 만난 적 있었죠?" 유비가 봉투 안에 들어 있었던 다른 종이를 내밀었다. 신문 기사를 스크랩한 거였다. 196년자 기사였다. 푸른 눈 두 개가 좌우를 오가며 기사를 훑었고, 그러자 모든 조각이 맞아떨어졌다. 그때 그 사람이 관우였군. 나만 모르고 있었구나.
"그런 것 같네요." 그들은 그 이상으로 과거를 언급하지 않았다.
"담배 피워도 됩니까?" 멍한 표정으로 입에 담배를 물고 불을 붙이려던 유비가 이 공간에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불을 끄고 장료에게 물었다.
"네."
"한 대 줄까요?"
"……네." 건강은 물론이거니와 직업상의 이유로 끊은 지 오래였지만 오늘은 일탈을 해도 될 것 같았다. 장료는 그에게 담배를 건네는 유비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폭발 일보 직전인 스트레스를 겨우겨우 억누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 그쯤은 해야 나라를 해 먹겠지……
둘은 말없이 담배만 태워댔다. 불이 꺼져갈 무렵, 유비는 완곡하지만 단호하게 관우의 장례는 시신을 되찾은 뒤 가까운 친인척들끼리만 치를 것이며, 장료를 포함한 외부인은 참석할 수 없다고 말했다. 장료는 수긍했다. 애초에 그가 낄 만한 곳도 아니었다는 사실이 확실해진 이상 굳이 무리한 요구를 할 이유가 없었다. 그들은 매캐한 연기만을 남겨둔 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떠나갔다. 바스러진 담뱃재를 한참 노려보던 장료는 편의점으로 내려가 담배 한 갑을 사 왔다. 동이 트기도 전에 한 갑을 전부 비울 수 있었다.
十四.
유비는 오해에 대한 대가로 장료의 여행 경비를 지원해 주었다. 덕분에 장료는 성도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최고급 스위트룸에 머물게 되었지만, 풍경을 즐길 여유는 없었다. 기분을 좀 끌어올려 보기 위해 찾아간 판다 기지는 겨울이라 그런지 삭막했다. 판다들은 실내에서 잠만 퍼질러 자고 있었고, 다른 것을 구경하기에는 눈이 내린 날이라 기분만 더 잡치고 돌아왔다. 오늘이 벌써 마지막 날인데, 본래 목적에 맞게 과거의 기억을 털어내고 후련해지기는커녕 모든 상황과 환경이 그에게 달라붙어 그를 우울과 무기력으로 밀어 넣고 있었다. 장료는 간신히 안정제의 일일 복용 한계치를 유지하고 있었다. 머릿속에서 자꾸만 그 구절이 맴돌았다.
잘 살아라, 안 좋은 기억은 잊고.
아쉬워하지 마. 그때가 되면 나라는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마저 잊게 될 거야.
대체 어떻게 잘 살라는 거지? 안 좋은 기억이란 기억은 자기가 잔뜩 남겨놨으면서? 장료는 이미 너덜너덜해진 편지를 완전히 구겨 벽에 던져버렸다.
"어떻게 잊으라는 거야?"
과열된 생각은 의도하지도 않았는데 불쑥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내가 정말 미쳐가는구나. 관우는 그의 인생에 작지만 강렬한 흔적을 남겼고, 그것은 지금까지도 그의 삶에 파고들어 와 있었다. 아니, 그가 없었다면 현재의 자신도 존재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을 어떻게 잊을 수 있단 말인가? 만약 관우가 그게 가능한 초인이라면, 그와 관우는 애초에 함께할 수도 없을 만큼 다른 사람인 셈이다. 아니…… 그게 맞지. 내가 착각했던 것뿐이지. 그때 진작 편지를 뜯어봤어야 했다. 그것을 미루고 미루다 여기까지 찾아오게 된 자신이 한없이 어리석게 느껴졌다.
아니다.
이 끔찍한 굴레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었다.
이미 여러 번 해 봤잖아. 잘 생각해 보자.
삶은 항상 이런 식이었어. 알잖아? 오늘은 괴로운 날인 거고, 살다 보면 좋은 날이 또 올 거야. 그건 내 의지대로 조절할 수 없는 게 아니야.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하니까 힘든 거야. ……그들은 죽었지만, 그들과 함께했던 기억은 순전히 내 거야. 내가 감당하고 살아야 하는 거라고. 떠넘길 수 없어. 죽고 싶니? 무책임하게 그렇다고 답하지 말자, 내가 정말로 바라는 건 그게 아니잖아.
그렇게 자신을 다스리고 나자, 방 한구석에 떨어져 있는 종이가 눈에 들어왔다. 장료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것을 주워들고 조심히 폈다.
오래 전 그는 남은 것을 불태운다면 그에 얽힌 기억도 없앨 수 있을 것이라는 착각 때문에 큰 실수를 저질렀다. 이번에는 다를 것이다. 관우는 죽었다. 그가 어떤 사람이었든 간에, 그와의 관계는 끝났다. 그를 비롯한 많은 사람이 죽음으로 그의 곁을 떠나갔지만, 장료는 자신의 삶을 물들인 사람들을 영원히 도려내지 못할 것이다. 심장을 잘라내는 짓을 할 수는 없으니까.
그렇다면 보다 현명한 방법으로 그들을 안고 살아가는 것이 자신을 위한 길일 테다. 장료는 다시 한번 편지를 정독했다. 익숙한 필체의 글자를 하나하나 눈에 담을 때마다 오래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가 장료에게 남긴 유산은 이것뿐이었다. 그가 담겨 있는, 그를 온전히 추억할 수 있는 물건은 이것밖에 남지 않았다. 장료는 그를 잊지 못할 것이고, 또 그를 기억하길 원했다.
생각이 그렇게 정리되자, 그가 해야 할 일은 명확해졌다. 장료는 편지를 여러 번 접어 지갑 속에 넣고 침대에 드러누워 눈을 감았다. 내일 일어났을 때는 기분이 괜찮아져 있을 것 같았다, 떠나는 발걸음이 가벼울 것 같았다. 오늘만큼은 무의식에서 보게 될 사람들도 두렵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만나고 싶었다. 그들의 얼굴이 텅 비어 있다 해도, 현실에서는 죽은 사람이라고 해도 괜찮았다. 그들과 함께했던 기억은 장료의 안에 살아 숨 쉬고 있으니까.